“땅, 땅따당. . .”
총소리가 좁은 연봉동의 차디찬 겨울공간을 찢어놓는다.
중국의 장백조선족자치현과 마주한 북한의 국경도시 혜산시 연봉동은 공개처형을 하는 장소로유명하다. 북한에서 탈북하여 한국에 입국한지도 어연 5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종종 꿈에 떠올리는 그곳, 인권유린의 산증인이 되어 김정은과 공산독재세력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2008년 11월 추운 북방의 겨울 어느 날, 그날의 광경은 지금도 꿈속에서 나의 심장을 옥죄어버린다. 공개처형을 하는 날이면 직장인들과 상인들을 포함하여 온 시내의 주민들은 집체로 총살현장에 올라간다. 시장입구의 큰 대문짝에는 시인민위원회 법무부에서 ‘공개처형으로 당 일 시장을 보지 않으니 연봉동 총살현장에 올라갈 것’이라는 공시문이 나붙었다.
출근하여 당세포비서의 뒤를 쫓아 공개처형현장으로 올라갔다. 양강도 혜산시의 연봉동으로 올라가는 시내길은 차도까지 주민행렬이 꽉 메웠다. 이 공개처형장은 혜산호프농장의 호프밭이지만 가을에 수확한 후에는 호프줄기를 거두어 사격장 같은 공간이 형성되면서 줄곧 총살현장으로 되군 한다. 나는 벌써 수차례나 이 장소에서 공개처형하는 것을 보아왔다. ‘오늘은 누가 무슨 죄로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지’ 이런 생각으로 행렬에 섞여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섰다.
관중들이 모여들어 시간이 흘러 10시가 가까워지자 RV식의 러시아‘우와즈’차량이 도착하였고 눈을 가린 5명의 ‘죄수’가 두 손을 뒤로 결박한 채 짐짝이 부려지듯 땅에 내던져졌다.
그전에 처형을 목격할 때에는 뒤쪽에서 보았지만 오늘은 빨리 현장에 도착한 탓에 가장 앞쪽에 서게 되어 뒤로 빠지려 했지만 빽빽이 늘어선 관중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맨앞에서 보게 되었다. 앞에는 기다란 책상이 호프밭의 땅위에 놓이고 중앙에서 내려왔다는 판사와 도보안국장, 도인민위원회 법무국장, 도재판소소장이 늘어서서 관중을 향해 위협적인 눈총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진 ‘죄수는 5명이었고 그중 한명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 못하는 듯 뒤로 결박한 양손을 보안원(북한경찰)들이 잡고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총실현장에서 발악을 할까봐 끌려나오기 전에 죽도록 때려서 거의 반주검을 만들어서 끌어낸다고 하였다.
헝겊 천으로 눈이 가려진 체구가 작은 여성은 머리를 떨군 채 흐느껴 우는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추운 북방날짜는 11월에 내린 눈이 봄까지 녹지 않고 밭을 하얗게 덮어놓는다. 더운 여름철에 체포된 그들은 천으로 된 운동화와 편리화(북한여성들이 신는 천신)를 신고 있었다. 눈이 신발을 적시고 추운 겨울날씨에 발이 시리겠으나 잠시 후에는 그런 감각도 모르리라.
중앙에서 내려온 판사가 큰소리로 그들의 ‘죄행’을 읽기 시작했다. ‘이년놈들은 국경지역인 혜산시에 장사를 하려고 함흥에서 온 2명의 여성을 중국에 팔아넘겼다. … 공화국형법 제62조에는 공민이 조국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쳤거나 투항, 변절하였거나 비밀을 넘겨준 조국반역행위를 한 경우에는... 무기로동교화형 또는 사형 및 재산몰수형에 처한다고 명기되어있다... 이렇게 서두를 뗀 판사는 이들이 2명을 넘겨준 대가로 중국돈 700위안 (약 100불정도)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들이 넘긴 여성들이 중국에서 공안에 잡혀 북송된 후 자기들의 월경을 도운 이들을 고백하여 체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18살과 21살의 어린 남자들은 피동적으로 심부름을 들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36살의여성과 20대 후반의 남자 두 명을 포함한 세명은 즉시 사형에 취해졌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2명은 질질 끌려서 차에 실려졌고 총살형을 선고받는 3명은 말뚝이 세워진 밭가운데로 끌려갔다。 매 사람마다 말뚝 하나씩에 고정시켜 매여진다. 보지 못하게 눈을 천으로 싸매고도 무어라 외치는게 두려워 입안에는 자갈을 물리고 끈으로 동여맸다. 가운데 말뚝에 여성이, 양옆의 말뚝에는 두명의 남자가 고정되었다. 말뚝에 고정하는 방식은 그전이나 지금이나 같은데 끈으로 머리와 가슴, 무릎 세 군데를 매놓는다. 묶여진 그들중에 여성이 몸부림쳐 보려고 하나 어찌나 꽉 매였는지 움쌀거리기만 한다. 남자 중의 한명은 거의 반응이 없다. 아마 그래봐야 소용없으니 마지막 기운마저 뽑을만한 힘도 없는가보다.
정복을 입은 3명의 보안원이 사격을 하려고 어깨에 자동보총을 메고 나섰다. 그들과 사형수와의 거리는 20m정도 되는 거리다. 자동보총은 사거리가 400m인데 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쏘는지, . . .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소좌견장을 단 보안원이 구령을 외친다.
“민족반역자들을 향하여 단발로 쐈!" 명령과 함께 3방의 총성이 울리면서 맨 옆 남자의 머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고 뇌수와 피가 주위의 흰 눈판위에 뿌려졌다. 아래턱부위만 남은 머리가 말뚝에서 인사하듯 숙여졌다.
“쐇!”
구령소리가 날 때마다 순서로 머리와 가슴, 무릎의 끈들이 총탄에 맞아 끊어지고 잠깐사이에 시신으로 변한 시체들이 땅위에 짐처럼 버려졌다. 한명은 무릎의 끈이 명중이 안되어 45도 각도로 말뚝에서 인사하듯 숙여지고 한 보안원이 칼을 가지고 나와서 끈을 잘랐다. 장갑을 낀 그의 손에는 윗몸에서 나오는 피가 떨어졌다. 그러자 그는 주위의 눈을 가지고 장갑과 칼에 묻은 피를 닦았다. 순식간에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뼈가 부러지면서 머리가 없는 시신들은 형체가 없어졌다. 호프밭의 하얀 눈은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 너무도 가까이에서 본 나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비린내가 주위에 퍼져나가고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긴장하고 불안한 안색을 지우지 못한채 누구라 없이 벙어리가 된 듯 체념에 빠져서 시내로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시신들은 흙이 발린 어지러운 벼가마니에 둘둘 말려서 트럭에 실렸다. 이 시신들은 죽어서도 가족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보안국에서 누구도 모르게 없애버린다. 이들의 나이는 김정은의 나이또래이다. 그들에게도 부모가 있고 처자가 있다. 과연 이들이 그렇게 죽을 죄를 지은 것인가? 남한에서는 하루만 일해도 벌수 있는 돈을 왜 그들은 그렇게라도 벌려고 했을까? 아마 배급을 주고 공장에 나가면 일감이 있어서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함흥에서 온 여성들이 중국에 가고 싶다기에 도와준 일이고 그들을 속여서 신매매한 것도 아니다. 함홍에서 얼마나 먹을 것이 없고 살기 힘들었으면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중국으로 가기를 바랐을까?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은 90년대 중반에 300여 만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굶겨죽였다. 사적소유가 인정되지 않고 배급과 상품구매권제도에 매달려 사는 북한, 그 땅의 성실한 국민들은 일당독재의 선전선동에 세뇌된 채 조금만 참으면 강성대국이 된다는 속임수에 덤덤히 있다가 기아로 몰살당했다. 죽음을 각오한 탈북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탈북여성들은 장가를 못간 중국인 장애자들에게 팔려서 시집가기도 하고 공안에 잡혀서 북송되면 고문과 처형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하나뿐인 TV채널마저 노동당선전선동부의 철저한 장악과 감독, 통제로 오직 김정은의 의도대로 전 국민을 세뇌시키는 집단, 남한방송을 듣지 못하게 주파수를 변환하는 다이얼을 없앤 라디오를 판매하고 남조선TV방송이나 라디오를 들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총살에 처해지는 인권불모지 지옥의 땅, 인터넷은 김정은과 고위특권층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폐쇄의 땅, 북한은 현대판노예왕국일 뿐이다.
인간은 눈과 귀, 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보고 듣고 말할권리가 있다. 제아무리 김정은 군사깡패집단이 국민의 눈과 귀, 입을 틀어막아도 정의를 향한 국민대중의 민주화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공포정치로 국민의 생명을 마구 난탕질하려는 인권도살자들에게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반드시 내려질 것이다.